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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3. 13世 〉8. <요재공>석남재기(石南齋記)휘기(諱琪)
1. 문헌 목록 〉13. 13世 〉10. <부정공>성균진사월천공휘시술묘표(成均進士月川公諱時述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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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부정공>처사휘시구가장(處士諱時耈家狀)
處士諱時耈家狀 吾趙之先玉川世家自虔谷先生瑜筮遯順天爲湖南之世族焉府君父祖以上圭組聯綿於 朝父祖以下德義見重於鄉府君諱時耈字德叟初諱時遇豊川盧氏譜女序載初諱初諱珏訓鍊院奉事考諱義吉通德郎於虔谷先生爲六七世孫也妣恭人木川張氏參判弘迪女 天啓四年甲子即我仁祖憲文大王元年八月十五日生府君志氣儒雅威德莊重養身心以怡安課兒孫以詩禮盡愛敬心事親自踈畧之至孝尊長衣食卑幼禮節可及於張公藝之家道德勸禮交患恤過規將追於藍田呂氏鄉約用力克篤行誼敦重鄉之士敬其德慕其義待之以師長而府君三世以行義俱見於鄉案與邑乘向所謂父祖以下德義重鄉者此也及居前後憂哀毀踰禮其在宗族鄉黨或有恃豪強利己害人者則凛凛乎抑強扶弱之風裁或有荒嬉廢事乖亂彛倫則懇懇乎謹勤誠明之德敎若使苟位於一命則其存心愛物必有所濟於人矣惜乎以剌史之不能薦乃隱居行義而終焉士之窮達無乃有命也歟甞攷之當日所施則視姪如子視婣如睦至若田廬奴婢物均給于弟之系子維城妹之系子李以苾襟卷昭然傳世此可以見府君德行之本於仁也卒年未詳而忌四月二十六日葬住岩面蘆洞山道理峰親塋右崗酉坐配豊川盧氏司宰監正胡女玉溪先生稹弟徙菴公進士裸曾孫女忌二月二十三日墓雙塋后配密陽朴氏在春女忌十月二十一日墓本面弓角村後鼓巖洞東麓鸛峰下蟻亭嶝亥坐育三男四女長男維春次維夏維憲女許援張悻金墺張恃妻也光耘東耘相耘成耘長房出也次二房幷無育曾孫重命斗命新命東耘男而重命出系光耘天命相耘男載命成耘男嗚呼府君之斧堂本與前配雙塋今至十世則殆三百年于玆矣粤自家庭世有傳來説云就此一壙以上是爲明堂此則誤占也且有近交遠友之從曾歷覽者與工於地理家之説者亦皆如出一口曰上乃眞穴此則體魄不寧將有消骸之患而謾爲所守有待後人矣於是宗議咸懼其不寧協謀避凶就吉而數百禩舊塋固不可以輕妄故更爲廣詢于地家幾處以丙寅二月二十四日乙丑即寒食也確窆移上定眞之計因啓舊壙則灰郭鞏固棺槨餘存壙室溫淨體骸完重安穩使七八九世孫庶獲承顔之喜此亦豈非吉壙耶雖然向上開壙土室呈凝瑞吉故移奉于新壙而配位則不遷今爲上下塋也夫地理説之惑信也自今以後府君之體魄安寧後孫之餘蔭芬榮比舊維新亦不能無望也昩余不肖自經緬奉憾徹于心痛悔終身對人每道此事曰吾家在府君之世庶可謂得之爲有財其於養生送死無憾也矣府君體幹之俊偉自是天資之邁倫也棺槨之保安固是地室之獲吉也就中送終諸具之苟完備亦莫非君子不儉其親之厚也顧此後承之不得而無財未免於使土親膚者寧不泚顙乎距今曠世之下追述其嘉言善行泯多傳少固其然也惟此閲累世而緬葬誠一異事故幷錄如此窃願後來將有誌碣之營則亦記其實使知今日事之永爲鑑戒於家傳也後移安于舊壙今爲雙塋 七世孫 世根 謹述 처사휘시구가장(處士諱時耈家狀) 우리 조씨의 선계는 옥천 세가로 건곡 선생 유(瑜)가 처음 순천에 자리잡은 뒤로 호남의 세족이 되었는데 부군의 부조 이상은 고관대작을 잇따라 이어왔고, 부조 이하는 덕행과 절의로 향방의 칭송을 받아 왔다. 부군의 휘는 시구(時耈) 자는 덕수(德叟) 초휘는 시우(時遇)요, 조의 휘는 각(珏)인데 훈련원 봉사요, 고의 휘 의길(義吉)은 통덕랑인데 건곡선생의 六七세손이었다. 비는 공인 목천장씨(木川張氏) 참판 홍적(弘迪)의 딸로 천계(天啓) 四년(一六二四) 갑자 八월 十五일에 부군을 낳았는데 지기가 바르고 위덕이 씩씩하여 몸과 마음을 화의로써 기르고 아손을 시예로써 가르치며 애경(愛敬)한 마음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기었다. 웃어른을 존대하고 아래사람을 애휼한 예절은 가히 장공예(張公藝)의 가풍을 따르고 도덕과 예절을 권장하며 환란을 구휼한 것은 장차 남전여씨 향약을 본받아 힘써 행의가 두텁고 무거우니 한 고을의 선비가 그 덕을 공경하고 그 의리를 감복하여 망사(望師)로 대접하였다. 부군의 三세가 행의로써 향안(鄉案)과 읍지(邑誌)에 올랐으니 먼저 말한 부조(父祖) 이하가 덕으로써 향방의 추중을 받은 것은 이로 인함이었다. 전후의 거상에 매우 애통해 하였으며 그 종족과 향당에 혹 호족(豪族)을 빙자하여 강제로 자기를 이롭게 하고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한 자가 있으면 강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운 풍도가 늠름하고 혹 거칠게 놀고 일을 아니하며 떳떳한 천륜을 어지럽힌 자가 있으면 성명한 덕교를 간절히 하여 부지런히 힘쓰도록 하였으니 만일 구차하게 벼슬 자리에 나아가 치정하였더라면 그 마음을 가지고 물건을 사랑한 치적(治蹟)이 가히 볼만한 것이 있었을 터인데 아깝게도 자사(刺史)의 천거가 없어 이에 숨어 살며 의리를 행하고 세상을 마치니 선비의 궁달이 이에 운명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일찌기 공이 가정을 이끌어 갔던 행적을 살펴보면 조카를 자식같이 보고 척족을 친족같이 보았으며, 전답, 노비, 기물을 아우의 계자 유성(維城)과 누이의 계자 이이필(李以苾)에게 고르게 나누어준 기록이 소연히 세상에 전하니 이것으로써 가히 부군의 덕행이 인의에 근본하였음을 보겠도다. 세상을 떠난 해는 알 수 없으나 제사일은 四월 二十六일인데 주암면 노동산 도리봉 친영의 오른쪽 언덕 유좌에 안장하였다. 배는 풍천노씨(豊川盧氏) 사재감(司宰監) 정호(正胡)의 딸이요, 옥계선생의 아우 사암공 진사 라(裸)의 증손녀인데 제일(祭日)은 二월 二十三일이요, 묘소는 쌍봉이며, 후부인은 밀양박씨 재춘(在春)의 딸인데 제일은 十월 二十一일이요, 묘소는 본면 궁각촌 뒤 고암동 동쪽 산기슭 황새봉 아래 의정(蟻亭)등 해좌이다. 남은 유춘(維春), 유하(維夏), 유헌(維憲)이요, 여는 허원(許援), 장시(張恃), 김오(金墺), 장행(張悻)의 처이며, 광운(光耘), 동운(東耘), 상운(相耘), 성운(成耘)은 장방출이고, 차이방은 다 기출이 없으며, 증손 중명(重命), 두명(斗命), 신명(新命)은 동운의 남인데, 중명은 광운의 후사로 출계하고, 천명(天僉)은 상운의 남이요, 재명(載命)은 성운의 남이었다. 아! 부군의 묘소가 원래 전배와 쌍분인데 十세를 내려온 지금 자못 三백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곰곰이 생각하니 가정에 전래한 말에 의하면 한자리 위가 참으로 명당이요, 지금 그 자리는 잘못 정한 자리라 하고 또 원근간에 경력이 있는 사람과 지사의 말을 종합하여도 위가 진혈이요, 이곳은 체백이 편안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장차 소골될 근심이 있으므로 그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 하므로 종중이 다 송구하여 병인년 二월 二十四일 한식일에 위에 진혈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구광(舊壙)을 열어본즉 해체가 무겁고 편안하여 七, 八, 九세손이 다 거의 승안할 수 있었으니 이 어찌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비록 그러나 새로 천광한 자리가 서기가 어리므로 새 광으로 옮겨 모시고 배위는 옮기지 아니하여 비로소 위아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앞으로는 부군의 체백 안녕과 후손의 번영이 그전보다 더욱 새로와지기를 옹망한 바이로다. 불초가 면봉한 뒤로 매양 마음에 감동한 바가 있어 항상 이 일을 말하되 우리 집이 부군의 세대에 가산이 풍요하여 양생송사(養生送死)에 여감이 없었다 하였다. 부군의 체질이 건장한 것은 하늘이 주신 품부요, 체백의 안녕은 땅이 보우한 길지며 치상 제구의 완비는 또 군자가 어버이께 검약하지 아니한 후의가 아니겠는가? 돌아보건대, 이 후손이 영락하여 마지막 보낸 자리에 예제를 지키지 못한 것은 어찌 공구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제 세대가 아득한 지금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을 기술하는데 있어 민몰한 것이 많고 전하는 것이 적은 것은 진실로 그렇다 하려니와 이 여러대를 경과하며 면례하고 장사한 정성이 지극했던 것은 아울러 이와 같이 기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원하건대 뒤에 묘도에 지갈을 경영하면 이 사실을 기록하여 오늘 일을 영원히 귀감으로 삼을 지어다. 뒤에 다시 구광으로 옮겨 쌍영이 되었다. 七세손(世孫) 세근(世根) 삼가 기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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